앰버디자인 LED

본문 바로가기

회원메뉴

묻고 답하기

신 바다이야기 ㎌ 0.rpd641.top ㎌ 릴게임 황금성릴게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영규용남 작성일25-08-04 04:17 조회19회 댓글0건

본문

【73.rpd641.top】

신 바다이야기 ㎌ 78.rpd641.top ㎌ 릴게임 황금성릴게임


신 바다이야기 ㎌ 77.rpd641.top ㎌ 릴게임 황금성릴게임


신 바다이야기 ㎌ 4.rpd641.top ㎌ 릴게임 황금성릴게임


신 바다이야기 ㎌ 55.rpd641.top ㎌ 릴게임 황금성릴게임

바로가기 go !! 바로가기 go !!

강원랜드 잭팟 확률 슬롯머신 판매 중고 무료바다이야기 온라인황금성주소 바다이야기온라인 릴게임 알라딘릴 바다이야기 넥슨 보물섬릴게임 알라딘온라인릴게임 강원 랜드 슬롯 머신 하는법 야마토2동영상 바다이야기환전 황금성 무료머니 황금성3게임연타 바다이야기 무료머니 슬롯게임 하는법 져스트릴게임 무료백경 온라인슬롯 배팅법 백경다운로드 무료슬롯머신 알라딘꽁머니 야마토2 온라인 런처 바다이야기기계가격 슬롯사이트 신천지릴게임 키지노릴게임 바다이야기 먹튀사이트 오리지널황금성3게임 프라그마틱 홈페이지 바다신2 영상 잭팟 슬롯 10원바다이야기 다모아릴게임 신천지사이트 황금성사이트 릴게임사이트 무료 슬롯 머신 다운 받기 황금성 사이트 카카오야마토먹튀 종합릴게임 파칭코게임다운로드 체리게임주소 무료슬롯체험 오션파라다이스 예시 야마토게임후기 바다이야기PC버전 슬롯 머신 html 로또달팽이 릴게임다운로드 바다 슬롯 먹튀 바다이야기 예시 종료 릴게임놀이터 슬롯 무료스핀구매 최신야마토게임 황금포커성 황금성갈갈이 황금성동영상 백경게임예시 바다이야기공략법 황금성갈가리 황금성게임예시 릴게임5만 강원랜드 슬롯머신 가격 동영상황금성 스톰게임 pc릴게임 슬롯무료게임 릴게임 코리아 백경게임 하는곳주소 바다이야기온라인 오리지널야마토 황금성배당 한게임바둑이 바다이야기 예시 릴게임골드몽 성인릴게임 다빈치 릴게임 바다이야기오리지널 신야마토 신 바다이야기 카지노 잭팟 파칭코게임다운로드 황금성게임공략방법 프라그마틱 무료게임 체리마스터 판매 바다이야기PC버전 황금성검증 황금성포커게임 모바일파칭코 종합릴게임 신천지게임다운로드 프라 그마 틱 무료체험 머니 야마토 2 온라인 게임 모바알바다이야기 온라인삼국지 바다이야기7 골드몽먹튀 바다이야기 환전 최신바다게임 황금성 제주도 프라그마틱 무료 릴게임 확률 온라인황금성주소 신천지게임사이트 우주전함 야마토 2199 부산야마토 온라인황금성 무료 슬롯 머신 다운 받기 백경게임랜드 바다이야기배당 바다이야기 도박 파친코게임 모바일릴게임 바다게임 바다이야기먹튀신고 오션파라다이스게임사이트 오션파라다이스하는방법 강원랜드이기는법 릴게임5만 빠친코게임 슬롯머신 잭팟 슬롯종류 무료 황금성게임 [신정임 기자]

[이전 기사] 매년 30명씩 죽어나가던 현장... "바꿔보고 싶었다" https://omn.kr/2erav










▲  기관차를 검수하는 일을 하는 정용진은 2003년 4.20파업을 앞두고 수색차량지부장이 되었다.


ⓒ 정용진 제공




맞벌이자녀교육비 도노조 민주화를 향한 발걸음은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갔다. 2000년 1월 대법원은 철도노조의 3중 간선제(세 번의 간접선거를 거쳐 철도노조 위원장을 선출하는 방식)가 위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2001년 5월 조합원들이 직접 뽑은 첫 민주집행부가 출범했다.

철도 안에 산적한 문제들을 풀어나가던 도중 철도노조는 최상위수학 2002년 2월 25일 파업에 돌입한다. 김대중 정부가 가스, 발전과 함께 철도 민영화를 추진하자 이를 막기 위해 벌인 집단행동이었다. 이틀간의 파업 끝에 민영화 추진을 온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근무형태 변경은 이끌어냈다.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3조2교대로 전환하는 데 합의했다. 1989년 주 44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이후 주 5일(40시간) 근무제가 논 10만원 빌리기 의되는 상황에서 여전히 주 62시간을 일하고 있던 철도노동자들로선 제일 큰 염원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파업 후가 더 중요했다. 철도청은 합의 이행보다 노조 탄압에 열을 올렸다. 파업참여자들에 대한 고소·고발과 대규모 징계를 벌였다. 기존 일터에서 먼 거리 지역으로 전출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용진이 속한 차량사업소에서도 지부장이 해고됐다 회생절차폐지 . 새로 지부장을 뽑아야 했다.
용진이 후보로 나섰다. 경선이었다.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신협국장을 하다가 현장으로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선거에 나서도 당선을 자신할 수 없었다. 동기들도 '떨어질 걸 왜 나가냐?'는 반응이었다. 굴하지 않고 용진은 진심을 꺼내 들었다. "노동조합을 지켜내겠다"는 마음 속 다짐을. 조합원 한 대학생대출금리 명 한 명을 만나갔다. 상대 후보를 지지하는 조합원이라도 빠짐없이. 만나면 "날 안 찍어도 되는데 혹시 내가 당선되면 집행부를 같이 합시다"라는 제안부터 했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2002년 가을 용진이 수색차량지부장이 됐다. 선거운동 제안대로 상대편을 지지했던 조합원들도 함께 집행부를 꾸렸다.
용진이 지부장이 된 뒤로도 철도노조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민영화라는 뇌관이 다 제거되지 않은 상황에서 2003년 2월 임기를 시작한 노무현 정부는 철도구조개혁 관련법안을 추진한다. 이에 맞서 철도노조는 파업을 준비하고 4월 20일 파업 하루 만에 바로 노정합의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합의에도 정부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관련 법안을 상정하면서 노조는 다시 파업을 준비한다. 4.20합의 당시 노조가 건설과 운영(개량, 유지보수, 열차 운행)의 분리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힌 부분을 정부는 시설(건설, 개량, 유지보수)과 운영의 분리에 대해 동의했다면서 이를 추진하려고 했다. 이는 철도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노조로서는 반대가 불가피했다. 하루 파업이긴 했지만 두 달 만에 다시 파업을 한다는 건 노조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 힘든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조합원들의 열망과 힘이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같이 갔다 같이 오는" 파업을 만들기 위해
다시 파업을 앞두고 용진의 고민이 커졌다. 2002년 첫 파업의 후과가 컸기 때문이다. 사업소 안에는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조합원들이 있었다. 특히 조장 역할을 하는 선임장들과 기술원들의 불참률이 높았다. 파업 후 이들과 파업 참가자들 사이 갈등이 심했다. 한동안 밥을 같이 안 먹었을 정도였다. 서로에게 날을 세워 상처도 많이 입혔다.
"서로에게 총질할 게 아니라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하고 인정하고 넘어가면 좋았겠지만 잘 안 됐어요. 그 상처들을 아물게 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해야 했죠."
2003년 4.20과 6.28 파업을 앞두고 용진은 그 부분을 가장 신경 썼다.
"우리 힘이 안 되면 파업을 하다가 깨질 수도 있어요. 사측과의 갈등은 어떻게든 극복하면 되는데 같은 조합원끼리 부딪히면 현장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요. 일을 하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고민이 많았어요. 파업이 깨지든 승리하든 파업에서 돌아와 같이 일을 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묶어낼까 하고요."
"조합원 신분은 다 함께 간다"를 기조로 삼았다. 파업 일정이 잡힌 뒤로 조합원들을 묶어내기 애썼다. 우선 사업소 앞에 텐트들부터 치고 매일 아침 집회를 하면서 조합원들의 마음을 모았다. 조합원들을 계속 만났다. "이번에도 빠지면 서로 힘들어진다. 조합원들은 징계를 안 맞도록 모든 책임은 지부장과 집행부가 지겠다"고 간곡하게 말했다. 설득이 통했는지 파업 당일, 선임장들과 기술원들까지 조합원들이 거의 모두 모였다.
6.28은 첫 산개투쟁이었다. 일을 멈춘 노동자들이 곳곳으로 흩어졌다. 용진의 지부도 15여 명씩 묶어 조별로 움직였다. 서로 연락을 하면서 춘천 등 곳곳으로 흩어졌다. 평소 교대근무로 얼굴도 못 보던 동료들과 어울리면서 조합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을 받았다. 똘똘 뭉친 노동자들만큼이나 정부도 강경하게 나왔다. 파업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가운데 당시 건설교통부가 법안 처리를 강행하면서 철도노조는 7월 3일 업무 복귀를 결정한다.
"파업을 정리할 때쯤 선임장 형님들이 사무소 근처 식당에 모여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불안했던 거죠. 사측에서 며칠 몇 시까지 복귀하라는 문자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가서 설득했죠. 같이 나왔는데 이렇게 들어가는 순간 조합원들이 등 돌려버릴 거다. 그러면 같이 일할 수 있겠느냐고요."
다행히 선임장들도 마음을 돌려 끝까지 함께했다. 파업은 끝내기로 했지만 기세는 꺾기지 않았다. 현장에 들어가기 전 주변 지부들이 수색역 광장에 모였다. 철길 따라 수십 개의 깃발을 앞세우고 700, 800명의 조합원들이 모였다. 결의대회를 하고 현장으로 들어갔다.
"같이 갔다 같이 왔기 때문에 기세 좋게 복귀했습니다."
합의 없이 복귀함으로써 이전 파업들보다 징계의 수위가 더 강할 것은 예상했다. 용진도 징계를 받았다. 철도청 징계위원회에서 징계가 확정된 100명 가까운 간부들 가운데 해임·파면은 98명. 그 안에 용진이 있었다.
"아쉬움은 없어요. 그때는 해고될 걸 생각하고 지부장을 맡은 거니까. 해고를 각오하지 않을 수 없던 때였죠. 현재의 철도를 바꿔내겠다는 마음뿐. 뒤가 없었죠. 내년, 내후년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근데 해고기간이 길긴 길었죠."

해고는 됐지만 세상을 고치는 데 한 몫










▲  정용진은 2003년 6.28 파업으로 파면을 당한다.


ⓒ 정용진 제공




그렇다. 길었다. 2003년 해고돼 2018년에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으니. 언젠가는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겠지, 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어느새 15년이 되었다. 그동안 철도노조로 출근하기도 하고, 회원으로 있던 노동자교육단체인 서울노동광장에서 상근자로 일하기도 했다. 디젤전기기관차를 고치지는 못했지만 대신 세상을 고치는 데 힘썼다. 2003년 이라크 파병부터 2017년 촛불항쟁까지 사회의 부조리함에 맞서는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다.

그와 함께 가정을 고치는 데도 마음을 다했다. 활동한다는 핑계로 소홀했던 남편과 아빠 노릇을 충실히 하려고 애썼다. 집에서 먼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딸아이를 위해 통학 기사를 자처했다. 아침마다 차에 태워 등교시켰다. 틈 나는 대로 밥과 반찬을 하고 아내의 도시락도 쌌다. 그렇게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면서 조금씩 가정에서의 자리를 찾아나갔다.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15년 동안 해고자로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2011년 서울노동광장 이춘자 대표의 유고는 오래도록 용진을 괴롭혔다.
"그날 대표님과 같이 내려갔어요. 서울에서 회의 끝나고 지하철 타고 부천역에서 내리셨지. 근데 그날 밤에 병원에 계신다는 연락이 온 거야. 너무 깜짝 놀랐죠. 평소 자주 댁까지 모셔다 드렸는데 그날도 그랬어야 했나 자괴감에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요."
이춘자 대표는 날카롭지만 다정한 사람이었다. 매섭게 현안을 파고들다가도 회원들을 살뜰히 챙겼다. 객지에 나와 고생하는 활동가들에게 직접 상을 차려 집밥 같은 밥을 먹이곤 했다. 이춘자 대표가 뇌출혈로 쓰러진 12월 16일도 당시 민주노총을 이끌고 있던 김영훈 위원장을 비롯한 여러 노동조합 간부들을 초대해 점심을 대접했다. 그렇게 낮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기분 좋게 웃던 이춘자 대표가 밤에 쓰러져 실려 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갑작스런 이별을 받아들이기도 벅찼지만 불시에 선장을 잃은 서울노동광장의 중심을 잡는 일도 급했다. 곧이어 통합진보당까지 분당 사태를 겪으면서 진보진영도 혼란스러워진 상태였다. 서울노동광장 회원들도 다양한 입장으로 흩어졌다. 그런 가운데 "그래도 여기를 지키자"고 마음을 낸 사람들이 있었다. 용진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어느 쪽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과 같이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길을 모색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컸죠. 지키다 보면 양쪽으로부터 같이 할 수 있는 끈이 이어질 수도 있고. 5년 후든 10년 후든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여길 좀 더 적극적으로 지켰을 것 같아요."
이들은 서울노동광장 사무실을 탈바꿈해 '세상을 바꾸는 노동과 마을의 합체, 카페 봄봄'의 문을 열었다. '노동인권 공감밥상' '청소년노동인권활동가 교육' 등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면서 지역에 스며든 노동운동을 모색했다. "지켰지. 방향은 모르겠지만." 용진은 서울노동광장 대표직을 맡기도 했지만 지금은 후배들의 활동을 응원하는 걸로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복직한 현장,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  정용진은 해고된 지 15년 만인 2018년 복직했다.


ⓒ 정용진 제공




15년 만에 돌아간 현장은 바뀐 부분이 많았다. 소속만 해도 철도청에서 한국철도공사로 바뀌어 있었다. 근무체계도 변했다. 2005년 공사가 되면서 시행한 3조 2교대의 막바지였다.

"3조 2교대가 너무 궁금했어요."
주간-주간-야간-야간-비번-휴일이 반복되는 3조 2교대 근무를 할수록 "아, 할 만하다"는 기쁨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몇 개월 후 4조 2교대 시범운영으로 넘어간 뒤로 생각이 뒤집혔다. 주간-야간-비번-휴일로 근무체계가 돌아가면서 3조 2교대 역시 몸에 무리가 가는 근무체계였음을 알았다.
약간의 임금 손실을 걱정하며 4조 2교대 전환을 탐탁지 않아했던 조합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만족감을 드러냈다. 조합원들의 호감도가 높았음에도 시범운영을 5년 이상 끌어오다가 이제야 정식 운영 채비를 갖췄다. 사업소별로 인원을 세 조로 나누던 걸 네 조로 바꾸려면 인원이 더 필요한데 충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4시간 맞교대할 때엔 50대만 되어도 사람이 늙어 보였어요. 주름도 많고 얼굴도 새까맣고…. 내가 입사했을 때는 퇴직하면 형들이 5년을 못 넘긴다고도 했으니까요. 근무체계가 바뀌면서 일상문화도 바뀌었어요. 예전엔 오전 9시에 퇴근하면 저녁까지 술을 마시는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은 회식도 몇 달에 한 번씩 하고 술도 잘 안 마셔요."
철도공사로 전환하고 10년 가까이 신규 직원을 안 뽑아서 현재 젊은 직원들과 선임들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그래서 다 같이 하는 술자리가 사라졌다.
기관차도 바뀌었다. 용진이 입사했을 때만 해도 화석연료로 연료를 동력을 만드는 디젤전기기관차였다면 지금은 대부분 전기기관차로 바뀌고 고속열차도 생겼다. 15년 만에 잡은 공구로 낯선 전기기관차를 살펴야 했지만 몸은 일의 프로세스를 잊지 않고 있었다. 전기기관차 검수에도 천천히 적응해 갔다.
근무환경들도 많이 좋아졌다. 이제 작업복, 작업화 같은 물자들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임금도 많이 올라갔다. 근무체계도 좋아졌다. 끊임없이 안전 문제를 제기한 노동조합 덕분에 사고도 많이 줄었다. 대신 일상의 예민함들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다.
"공구대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공구를 쓰고 아무 데나 놔요. 또, 현장이 모래나 분진, 쇳가루들이 많이 날리고 쓰레기가 날아다니기도 해요. 그런 게 보여도 나서서 치우는 사람이 없어요. 각자 작업하는 공간도 잘 안 치우고요. 공동생활, 공동작업에 대한 문화가 필요한데 개별화되면서 하기 싫은 건 안 하는 거죠. 살맛나는 일터를 위해 그런 생활과 작업 문화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좁고 어두운 작업공간에서 손전등은 꼭 필요하다. 충전이 돼야 다음 조가 일을 하는데 일을 끝내고 충전기에 꽂아두는 사람도 별로 없다. "왜 곁을 보지 않지?" 혼자 일하는 공간이 아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용진은 스스로 치우면서도 어디서부터 이걸 바꿔 내거나 의식하게 만들지 고민이다.
"지부 간부들하고 이야기했어요. 공동의 생활문화를 바꾸는 캠페인을 하자고요. 함께 있는 젊은 친구들을 위해서죠. 5, 6년 후면 우리 사업소 60명 중 거의 30명은 정년으로 나가거든요. 그러면 이 친구들이 현장을 이끌어가야 하는데 이대로 가면 앞으로 더 (조직이) 개인적인 성향이 될 거잖아요. 옆을 더 안 보겠죠."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다시 돌아가도 지부장 할 것 같아?"라고. 그럴 때면 "그 나이로 돌아가면 또 할 것 같아. 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라고 답한다.
'그때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 그러기 위해 힘을 만드는 것'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깨달았다. 힘만으로는 현장을,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힘이 있다고 해서 다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돌아간다면 좀 더 장기적으로 바라보면서 일상을 바꾸고 조직사업을 하면서 싸움들을 준비할 것 같다. 과거에 조합원들은 물었다. "매번 싸움이야? 매번 파업이야? 그래서 우리가 얻은 건 뭐야?"라고. 싸움의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빠져 있지는 않았을까.
앞만 보고 온 것 같아 아쉽다. 내년도 내후년도 보고 했어야 했는데. '싸움을 통해 사람은 변한다'는 명제만 붙들고 온 건 아닌지 되돌아본다. 한참 살아본 사람으로서 다시 돌아간다면 그런 고민을 더 많이 하지 않을까.

인생의 황혼을 앞두고










▲  15년 만에 돌아간 현장에서 정용진은 개별화된 현장의 공동생활문화를 바꾸는 고민과 함께 노동조합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하고 있다.


ⓒ 정용진 제공




그렇다고 지금 노동조합 간부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제는 그동안 많이 미안했던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내 마지막 삶에선 이 사람이 활동하면서 고민하는 문제들, 뭔가 하고 싶거나 필요로 한다면 내가 힘이 되어주는 역할을 하면 참 좋겠어요."
첫째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까지 데려다줘도 돌아오거나 아예 집 현관부터 안 가겠다고 버티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날도 용진은 출근하고 집에 없곤 했다.
"그때는 많이 미안하긴 했지만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마음이었어요."
몇 년 후에야 용진은 그건 부족한 최선이었음을 알게 됐다. 코로나19가 세계를 삼키기 전, 집에 있는 카니발을 개조해 용진 부부는 차박을 떠나곤 했다. 서해, 동해, 내륙 등 발 닿는 대로 향했다. 좋은 경치를 만나면 거기에 차를 세우고선 술을 한 잔씩 기울였다. 필요한 얘기만 하던 사이가 바뀌었다. 말이 없던 용진이 점점 수다쟁이가 되고 이제 둘은 편안한 술친구가 되었다. 퇴직을 하면 전 세계를 돌면서 둘이서 한 달 살이를 하자고 함께 꿈을 키워가고 있다.
또, 성실하게 삶을 꾸려온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다. "고통스럽고 힘들었을 텐데 꿋꿋이 자기 길을 걸어왔네. 남에게 이로운 일을 고민하면서"라고.
앞으로도 "남에게 관심을 갖고 표현하면서 살 것 같다"고 한다. 여기서 남이란 단순히 타인을 뜻하지 않는다. 지구, 생태계, 사람 관계 등등.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
"일상이 여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많이 걷는 편이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일부러 내리기도 하고 매번 다녔던 길을 돌아가기도 하고요. 그러면 새로운 풍경이 보이는데 요즘은 가게들이 눈에 띄어요. 임대를 내놓은 곳들이 많아요."
용진은 삶의 구석구석을 놓치지 않는다. 길을 걸을 때면 골목길의 구조도 살피고 그 골목길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도 한참동안 지켜본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더 오래 하늘을 본다.
"나는 노을이 너무 좋거든요. 노을이 좋아서 노을에 물든 그 풍경들도 다 예뻐 보이죠. 집 앞, 골목, 현장, 바닷가 등등. 다 다른 풍경들을 마음에 담아요."
용진의 인생길도 노을을 만나는 시간대에 접어들었다. 뜨겁게 온몸과 마음을 다해 달려왔던 한낮이 지나간 시간.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가 남지 않는다. 이제 앞을 보느라 옆을 살필 여유가 없던 그때를 지나 은퇴 후를 상상한다. 아마도 아내 김상미와 함께 손잡고 걸어갈 그 길도 붉은 기운이 깃들어 아름다울 거라고.
덧붙이는 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이메일추출방지정책

회사명 : 앰버디자인LED 사업자 등록번호 : 502-13-40930 대표 : 오문환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로13길 45-1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제2019-대구동구-0629호
전화 : 053-941-8668 팩스 : 053-941-8967 전자우편 : am8668@hanmail.net
Copyright © 2015 앰버디자인LED. All Rights Reserved.

구입문의

010-6532-8525


상담시간 평일(월 ~ 금요일)
AM 09시~12시, PM 13시~18시 까지
상담시간 외에는게시판 이용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