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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모아릴게임 ㈃ 사설바둑이 ㈃┪ 39.rmx342.top ◀권진규의 ‘코메디’(1967). 제작에 앞서 스케치를 여러 점 남길 정도로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부조 작품이다. 중앙의 가면과 양옆의 인물을 한 프레임에 잡아낸, 그리스로마시대 코미디 공연에서 따온 듯한 독특한 구상이 단박에 시선을 붙든다. 견고한 조형성을 바탕으로 동서양 문화를 접목했다. 뭔가에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 크게 벌린 입 모양, 진한 눈썹선 등은 한국 탈과 서양 가면을 섞어낸 형태다. 탈과 가면이 가진 ‘익명성’을 들여 사회로부터의 고립, 또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동시에 드러낸 작가의 의도가 읽힌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테라코타에 채색, 71.5×97.5×9㎝.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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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채무불이행이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24시간신용대출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서울 성북구 동선동. 가파른 골목길 끝에서 보랏빛 대문 하나를 만난다. 조용히 놓인 그 문은 한 조각가의 아틀리에로 주택금융공사 보금자리론 이어진다. 흙으로 형상을 빚으며 고요하고 단단한 조각을 만든 그는 필즈상 수상자인 수학자 허준이의 외가 쪽 친척이자 방탄소년단 RM이 작품을 소장하고 깊이 아낄 만큼 최근 대중의 관심을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권진규(1922∼1973).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와세다대학에서 상업을 건축허가신청 전공한 뒤 귀국해 사업가로 활동했다. 3층짜리 서양식 건물에서 양품점을 운영했고, 부동산과 건축업에까지 손을 대며 함흥 번화가 ‘황금정’을 일궜다. 춘천에는 소유한 광산까지 있었다. 어머니 역시 넉넉한 참봉가의 딸이었다. 그런 집안의 아들인 권진규는 아버지에게서 사진기를 선물 받고 집에 암실까지 꾸밀 정도로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문제는 시대였다.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던 1943년, 일본에서 의과대학에 다니던 형을 따라 도쿄에 머무르던 권진규는 결국 징용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도쿄 외곽 다치카와시의 비행기 부품 공장에서 일했다. 1944년 가을 목숨을 걸고 탈출한 끝에 귀국했지만 조선에서도 징용이 시작되자 고향 과수원에 몸을 숨겨야 했다. 그렇게 무려 세 계절을 버틴 끝에야 광복을 맞이했다.
구상조각에 더한 조형적 긴장감…일본이 먼저 알아본 재능
광복 후 권진규는 화가 이쾌대(1913∼1965)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인물 표현에 뛰어났던 이쾌대는 인체의 골격과 근육 구조 등 데생의 기초를 철저히 가르쳤고, 권진규는 그 수업을 통해 기본기를 단단히 다졌다. 이는 훗날 그의 조각에 드러나는 사실적인 표현력의 바탕이 됐다.
처음 접한 것이 회화임에도 그림이 아닌 조각을 전공하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형과 함께 도쿄에 머무르던 시절, 히비야공회당에서 음악회를 관람하던 중 문득 ‘소리를 입체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음악을 시각적으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다.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나 스위스의 파울 클레는 ‘음’을 색채와 형태로 나타내고자 했다. 그들에 비해 ‘음’을 양감으로 풀어내려 한 권진규의 발상은 독특했다. 베토벤, 드뷔시, 바그너를 사랑하던 그에게 음악이 조각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 셈이다.
1948년 권진규는 다시 도쿄로 향했고, 이듬해 9월 무사시노미술대학 조각과에 입학했다. 당시 한일 간 국교는 단절된 상태였고, 일본 미술대학에 유학 중인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같은 작가들은 이미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였다. 권진규는 유학생 커뮤니티도 없이 오롯이 작업에 몰두했다.
권진규의 ‘지원의 얼굴’(1967). 실명의 모델로 제작한 여인상 중 가장 유명하다. 홍익대 강사 시절 제자 ‘장지원’이 모델이다. 외투를 입고 얼굴 주변은 머플러로 감싼 여인상은 무표정한 정적인 자세다. 하지만 길게 늘인 목, 가파르게 떨어뜨린 어깨선으로 구상조각에선 쉽지 않은 긴장감까지 빚어냈다. 처음 제작한 2점 중 하나는 일본 전시에서 판매했고 나머지 하나를 국립현대미술관이 구입했다. 이후 석고틀로 추가 제작한 몇 점 중 하나는 모델에게 갔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테라코타, 50×32×2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권진규는 프랑스에서 유학한 일본인 조각가에게 사사하며 기초부터 조각을 익혔다. 그를 통해 오귀스트 로댕의 제자이자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각가 앙토안 부르델(1861∼1929)의 작품세계도 접하게 됐다. 부르델은 권진규가 사랑했던 베토벤을 가장 많이 조각한 인물이기도 했다. 권진규는 그에게 깊이 매료됐고, 사실적인 묘사 속에 은근한 변주를 더하는 부르델 특유의 방식에 빠져들었다. 부르델의 화집을 손에서 놓지 않을 만큼 탐독하기도 했다.
노력한 만큼 성과도 따랐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권진규는 일본 미술계의 공모전인 ‘이과전’에 말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연이어 출품했고, ‘제38회 니카텐’에서는 ‘특대’라는 영예로운 평가를 받았다. 젊은 조각가로서의 가능성을 일본 미술계가 일찍이 주목한 순간이었다.
1959년 일본 유학을 마친 권진규는 귀국 후 서울 동선동 언덕 위에 자리한 아틀리에에 터를 잡고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나섰다. 말과 소 같은 동물상에서부터 인물의 흉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뤘으며, 부조와 환조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형상을 빚었다. 부르델처럼 알아볼 수 있는 구상을 바탕으로 하되, 조형적인 긴장과 감각을 위해 형태를 절묘하게 변형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다.
이러한 조형 감각은 작품 ‘코메디’(1967)에서 두드러진다. 인물상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단순화한 형태와 비현실적인 비례를 사용했고, 코믹하면서도 괴기스러운 표정이 강한 인상을 준다. 권진규는 고딕 성당의 조각과 부르델의 부조를 깊이 연구한 끝에 이 작품을 완성시켰는데, 수많은 스케치는 그가 이 작품의 구도와 형태에 대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알려준다.
권진규의 ‘말’(1969). 일본 유학시절부터 작가가 꾸준히 다룬 말의 머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말이 달리려는 순간의 극적인 움직임을 포착한 듯 머리를 살짝 젖힌 채 입을 벌리고 있다. 양감을 강조한 안면 근육에서는 말이 가진 힘이 드러난다. 흙 모형을 떠낸 뒤 표면을 매끄럽게 처리하고 산화철을 발라 붉은색을 냈다. 테라코타, 34×58×2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홍익대 강사 시절 자신을 따르던 제자를 모델로 제작한 ‘지원의 얼굴’(1967)은 일견 사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권진규는 모델의 목을 길게 늘이고 어깨선을 급격히 떨어뜨려 작품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구상 조각을 하면서도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표현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
재료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아무도 쓰려고 하지 않은 화강암처럼 단단한 석재에도 도전했고, 작가 초기에는 나무와 돌을, 이후에는 석고와 건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실험했다. 여러 재료 중 그가 가장 오랫동안, 가장 깊이 몰입한 재료는 점토를 고온에서 구워 만드는 ‘테라코타’(구운 흙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구우면 단단해지고 치밀해지는 점토의 성질을 이용해 제작한다)였다.
권진규는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지만, 테라코타는 오히려 잘 썩지 않는다”고 말하며 애정을 드러냈는데, 그의 말처럼 테라코타는 중국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에도 사용됐을 정도로 내구성이 좋다. 고온을 이겨낸 만큼 치밀하고 강인해지기에 그렇다. 수천 년의 시간을 버텨내는 이 재료에 권진규는 매력을 느꼈고 한국 조각계에서는 드물게 테라코타 작업에 꾸준히 몰두했다. 오래도록 남는 조각을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 어쩌면 오래도록 조각가로 남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각가 권진규. 서울 성북구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구상 중인 모습이다. 1971년쯤으로 보인다. 2년 뒤 권진규는 이곳에서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이라고 쓴 쪽지와 장례비 얼마를 남겨둔 채 세상을 등졌다. 권진규기념사업회 제공.
스스로 생 마감한 뒤 홀로 세월 지킨 ‘권진규아틀리에’
어느 쪽이었든 권진규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가 마주한 현실은 무척이나 냉혹했기에 말이다. 형상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권진규의 구상조각은 추상을 향하던 시대의 조류 속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1965년 서울 신문회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은 기대와 달리 냉담한 반응에 직면했고, 1971년 명동화랑에서의 개인전은 화랑 대표가 백방으로 뛰었음에도 작품판매로 이어지지 않았다. 인맥이 부족했던 권진규는 당시 대거 진행된 기념비나 동상 건립 같은 공공 프로젝트를 맡기도 어려웠다. 원체 조각 작업은 체력 소모가 큰 데다 재료비도 만만치 않은 터라 이런 상황에서 작업을 계속하기란 쉽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강마저 악화돼 1972년 말에는 고혈압과 신경성 수전증, 신장염 진단을 받았다. 결국 1973년 봄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이라는 짧은 쪽지를 남기고 홀로 끊임없이 흙을 빚던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삶을 마쳤다. 아까운 나이 쉰하나였다.
이런 그의 삶과 예술이 고스란히 스며든 공간이 바로 그 보라색 대문 너머의 권진규아틀리에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여동생 권경숙(1927∼2024) 씨는 권진규의 집과 작업실을 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했고, 지금 이곳은 마치 그가 사랑했던 테라코타처럼 세월을 버티며 그의 숨결과 흔적을 조용히 품고 있다. 그 울림을 느끼고 싶다면 꼭 한 번 찾아가 보길 권한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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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채무불이행이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24시간신용대출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서울 성북구 동선동. 가파른 골목길 끝에서 보랏빛 대문 하나를 만난다. 조용히 놓인 그 문은 한 조각가의 아틀리에로 주택금융공사 보금자리론 이어진다. 흙으로 형상을 빚으며 고요하고 단단한 조각을 만든 그는 필즈상 수상자인 수학자 허준이의 외가 쪽 친척이자 방탄소년단 RM이 작품을 소장하고 깊이 아낄 만큼 최근 대중의 관심을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권진규(1922∼1973).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와세다대학에서 상업을 건축허가신청 전공한 뒤 귀국해 사업가로 활동했다. 3층짜리 서양식 건물에서 양품점을 운영했고, 부동산과 건축업에까지 손을 대며 함흥 번화가 ‘황금정’을 일궜다. 춘천에는 소유한 광산까지 있었다. 어머니 역시 넉넉한 참봉가의 딸이었다. 그런 집안의 아들인 권진규는 아버지에게서 사진기를 선물 받고 집에 암실까지 꾸밀 정도로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문제는 시대였다.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던 1943년, 일본에서 의과대학에 다니던 형을 따라 도쿄에 머무르던 권진규는 결국 징용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도쿄 외곽 다치카와시의 비행기 부품 공장에서 일했다. 1944년 가을 목숨을 걸고 탈출한 끝에 귀국했지만 조선에서도 징용이 시작되자 고향 과수원에 몸을 숨겨야 했다. 그렇게 무려 세 계절을 버틴 끝에야 광복을 맞이했다.
구상조각에 더한 조형적 긴장감…일본이 먼저 알아본 재능
광복 후 권진규는 화가 이쾌대(1913∼1965)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인물 표현에 뛰어났던 이쾌대는 인체의 골격과 근육 구조 등 데생의 기초를 철저히 가르쳤고, 권진규는 그 수업을 통해 기본기를 단단히 다졌다. 이는 훗날 그의 조각에 드러나는 사실적인 표현력의 바탕이 됐다.
처음 접한 것이 회화임에도 그림이 아닌 조각을 전공하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형과 함께 도쿄에 머무르던 시절, 히비야공회당에서 음악회를 관람하던 중 문득 ‘소리를 입체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음악을 시각적으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다.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나 스위스의 파울 클레는 ‘음’을 색채와 형태로 나타내고자 했다. 그들에 비해 ‘음’을 양감으로 풀어내려 한 권진규의 발상은 독특했다. 베토벤, 드뷔시, 바그너를 사랑하던 그에게 음악이 조각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 셈이다.
1948년 권진규는 다시 도쿄로 향했고, 이듬해 9월 무사시노미술대학 조각과에 입학했다. 당시 한일 간 국교는 단절된 상태였고, 일본 미술대학에 유학 중인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같은 작가들은 이미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였다. 권진규는 유학생 커뮤니티도 없이 오롯이 작업에 몰두했다.
권진규의 ‘지원의 얼굴’(1967). 실명의 모델로 제작한 여인상 중 가장 유명하다. 홍익대 강사 시절 제자 ‘장지원’이 모델이다. 외투를 입고 얼굴 주변은 머플러로 감싼 여인상은 무표정한 정적인 자세다. 하지만 길게 늘인 목, 가파르게 떨어뜨린 어깨선으로 구상조각에선 쉽지 않은 긴장감까지 빚어냈다. 처음 제작한 2점 중 하나는 일본 전시에서 판매했고 나머지 하나를 국립현대미술관이 구입했다. 이후 석고틀로 추가 제작한 몇 점 중 하나는 모델에게 갔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테라코타, 50×32×2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권진규는 프랑스에서 유학한 일본인 조각가에게 사사하며 기초부터 조각을 익혔다. 그를 통해 오귀스트 로댕의 제자이자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각가 앙토안 부르델(1861∼1929)의 작품세계도 접하게 됐다. 부르델은 권진규가 사랑했던 베토벤을 가장 많이 조각한 인물이기도 했다. 권진규는 그에게 깊이 매료됐고, 사실적인 묘사 속에 은근한 변주를 더하는 부르델 특유의 방식에 빠져들었다. 부르델의 화집을 손에서 놓지 않을 만큼 탐독하기도 했다.
노력한 만큼 성과도 따랐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권진규는 일본 미술계의 공모전인 ‘이과전’에 말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연이어 출품했고, ‘제38회 니카텐’에서는 ‘특대’라는 영예로운 평가를 받았다. 젊은 조각가로서의 가능성을 일본 미술계가 일찍이 주목한 순간이었다.
1959년 일본 유학을 마친 권진규는 귀국 후 서울 동선동 언덕 위에 자리한 아틀리에에 터를 잡고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나섰다. 말과 소 같은 동물상에서부터 인물의 흉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뤘으며, 부조와 환조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형상을 빚었다. 부르델처럼 알아볼 수 있는 구상을 바탕으로 하되, 조형적인 긴장과 감각을 위해 형태를 절묘하게 변형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다.
이러한 조형 감각은 작품 ‘코메디’(1967)에서 두드러진다. 인물상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단순화한 형태와 비현실적인 비례를 사용했고, 코믹하면서도 괴기스러운 표정이 강한 인상을 준다. 권진규는 고딕 성당의 조각과 부르델의 부조를 깊이 연구한 끝에 이 작품을 완성시켰는데, 수많은 스케치는 그가 이 작품의 구도와 형태에 대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알려준다.
권진규의 ‘말’(1969). 일본 유학시절부터 작가가 꾸준히 다룬 말의 머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말이 달리려는 순간의 극적인 움직임을 포착한 듯 머리를 살짝 젖힌 채 입을 벌리고 있다. 양감을 강조한 안면 근육에서는 말이 가진 힘이 드러난다. 흙 모형을 떠낸 뒤 표면을 매끄럽게 처리하고 산화철을 발라 붉은색을 냈다. 테라코타, 34×58×2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홍익대 강사 시절 자신을 따르던 제자를 모델로 제작한 ‘지원의 얼굴’(1967)은 일견 사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권진규는 모델의 목을 길게 늘이고 어깨선을 급격히 떨어뜨려 작품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구상 조각을 하면서도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표현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
재료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아무도 쓰려고 하지 않은 화강암처럼 단단한 석재에도 도전했고, 작가 초기에는 나무와 돌을, 이후에는 석고와 건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실험했다. 여러 재료 중 그가 가장 오랫동안, 가장 깊이 몰입한 재료는 점토를 고온에서 구워 만드는 ‘테라코타’(구운 흙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구우면 단단해지고 치밀해지는 점토의 성질을 이용해 제작한다)였다.
권진규는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지만, 테라코타는 오히려 잘 썩지 않는다”고 말하며 애정을 드러냈는데, 그의 말처럼 테라코타는 중국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에도 사용됐을 정도로 내구성이 좋다. 고온을 이겨낸 만큼 치밀하고 강인해지기에 그렇다. 수천 년의 시간을 버텨내는 이 재료에 권진규는 매력을 느꼈고 한국 조각계에서는 드물게 테라코타 작업에 꾸준히 몰두했다. 오래도록 남는 조각을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 어쩌면 오래도록 조각가로 남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각가 권진규. 서울 성북구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구상 중인 모습이다. 1971년쯤으로 보인다. 2년 뒤 권진규는 이곳에서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이라고 쓴 쪽지와 장례비 얼마를 남겨둔 채 세상을 등졌다. 권진규기념사업회 제공.
스스로 생 마감한 뒤 홀로 세월 지킨 ‘권진규아틀리에’
어느 쪽이었든 권진규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가 마주한 현실은 무척이나 냉혹했기에 말이다. 형상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권진규의 구상조각은 추상을 향하던 시대의 조류 속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1965년 서울 신문회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은 기대와 달리 냉담한 반응에 직면했고, 1971년 명동화랑에서의 개인전은 화랑 대표가 백방으로 뛰었음에도 작품판매로 이어지지 않았다. 인맥이 부족했던 권진규는 당시 대거 진행된 기념비나 동상 건립 같은 공공 프로젝트를 맡기도 어려웠다. 원체 조각 작업은 체력 소모가 큰 데다 재료비도 만만치 않은 터라 이런 상황에서 작업을 계속하기란 쉽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강마저 악화돼 1972년 말에는 고혈압과 신경성 수전증, 신장염 진단을 받았다. 결국 1973년 봄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이라는 짧은 쪽지를 남기고 홀로 끊임없이 흙을 빚던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삶을 마쳤다. 아까운 나이 쉰하나였다.
이런 그의 삶과 예술이 고스란히 스며든 공간이 바로 그 보라색 대문 너머의 권진규아틀리에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여동생 권경숙(1927∼2024) 씨는 권진규의 집과 작업실을 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했고, 지금 이곳은 마치 그가 사랑했던 테라코타처럼 세월을 버티며 그의 숨결과 흔적을 조용히 품고 있다. 그 울림을 느끼고 싶다면 꼭 한 번 찾아가 보길 권한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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