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버디자인 LED

본문 바로가기

회원메뉴

묻고 답하기

다빈치게임 0.rqg933.top 알라딘다운로드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복아달지 작성일25-09-25 12:47 조회39회 댓글0건

본문

다빈치게임 37.rqg933.top 바로가기 알라딘다운로드



다빈치게임 80.rqg933.top 알라딘다운로드



다빈치게임 44.rqg933.top 알라딘다운로드



다빈치게임 86.rqg933.top 알라딘다운로드



다빈치게임 74.rqg933.top 알라딘다운로드



다빈치게임 91.rqg933.top 알라딘다운로드



다빈치게임 44.rqg933.top 알라딘다운로드



다빈치게임 77.rqg933.top 알라딘다운로드



다빈치게임 29.rqg933.top 알라딘다운로드



다빈치게임 55.rqg933.top 알라딘다운로드



다빈치게임 30.rqg933.top 알라딘다운로드



무료슬롯머신777 우주전함 야마토 2202 파칭코게임다운로드 오리지날야마토2게임 바다이야기노무현 백경게임하는곳주소 오리지날야마토 무료 릴게임 야마토 게임 오락실 빠칭코게임다운로드 릴신천지 바다슬롯 먹튀 파칭코사이트 바다신 게임 온라인릴게임사이트 슬롯종류 한게임머니파는곳 릴게임이란 오션파라다이스게임 빠찡코 스톰게임 모바일게임 바다이야기 예시 황금성게임앱 야마토2게임하기 사설바둑이 릴게임황금성 슬롯종류 야마토게임2 손오공 강시 인터넷신천지 릴게임용의눈 무료게임 체리마스터 pc용 릴게임놀이터 파칭코 게임 신천지게임 하는방법 인터넷예시게임 신야마토 바다이야기 사이트 온라인황금성 바다이야기환전가능 온라인릴게임 먹튀 검증 바다이야기파칭코 우주전함 야마토 2199 골드몽릴게임 파칭코종류 모바일황금성 온라인슬롯머신 온라인릴게임 릴게임동영상 알라딘예시 오션파라다이스다운로드 릴게임손오공게임 백경게임다운로드 바다이야기 노무현 온라인삼국지 사이다 릴게임 프라그마틱 슬롯 사이트 황금성게임앱 야마토게임공략방법 바다이야기슬롯 릴게임릴게임갓 jQuery 슬롯 머신 강원랜드 슬롯머신 종류 카지노 슬롯머신 규칙 무료게임다운로드 잭팟게임 온라인파칭코 모바일릴게임 종류 우주전함 야마토게임 바다이야기조작 최신릴게임 황금성오락실게임 야마토다운로드 슬롯 프라 그마 틱 무료체험 무료슬롯머신777 야마토게임장주소 해물어 슬롯머신 판매 중고 알라딘게임랜드 릴게임 꽁머니 황금성 다운 양귀비 릴게임 꽁머니 슬롯총판 야마토하는곳 슬롯모아 프라 그마 틱 무료체험 머니 매장판황금성 릴게임꽁머니 온라인슬롯머신 릴게임 코리아 파칭코게임다운로드 인터넷야마토릴게임 백경예시 바다이야기 코드 황금성하는곳 신 바다이야기 바다이야기오리지널 알라딘릴 슬롯머신 판매 중고 오션파라 다이스다운 무료슬롯사이트 모바일게임 바다게임사이트 황금성3게임공략법 황금성게임다운받기 오션슬롯 주소 손오공게임 황금성갈가리 야마토게임후기 황금성게임앱 손오공 게임 다운 바다이야기 모바일게임 야마토5게임기 슬롯 머신 이기는 방법 전함야마토 알라딘릴게임 88오락실릴게임 오션파라 다이스게임 하는법 릴게임추천 황금성게임다운로드후기 오리지날야마토 민청련동지회에는 민청련 활동 중 정권으로부터 당한 폭압의 결과로 활동 중 혹은 그 이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이 있다. 그 분들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민주항쟁 정신의 계승에 작으나마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민청련 두꺼비 열전'을 편찬한다.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아닌 무명의 헌신을 실천한 이들을 위주로 한다. 이름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는 삶의 스토리를 통해 민주항쟁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자말>
[조명자]
전두환이 집권한 1980년 이후, 정국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모진 탄압 속에 민주화운동 세력은 철저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 세상에서도 혜숙의 집안은 나름 평온했다.
1분자동대출
남편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기사연)의 보호막 속에서 바쁘게 지냈다. 연구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외국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는 등 여전히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예쁘게 자랐다.





노스트라다무스




▲  민청련 활동 시기. 왼쪽부터 박혜숙, 남편 최민화, 민청련 동지 김희택, 김희택 부인으로 글쓴이 조명자


ⓒ 민청련동지회

저축은행학생대출


민청련의 사랑방 된 세민약국

그렇게 세월이 흘러 1983년, 세상의 공기가 조금 달라지는 듯했다. 봄학기, 전국 대학가와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전두환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작은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5.18 3주기를 맞이 농협 비과세 복리 해 김영삼 신민당총재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는 뉴스가 조심스럽게 퍼져나갔다. 각 대학에서는 구속과 탄압을 뚫고 시위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남편의 주변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경남, 문국주, 이해찬, 장영달, 정문화, 조성우, 황인성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운동권 인사들이 집에 드나들며 매주 회동을 가졌다. 자세히 한국신용정보 는 모르지만 무슨 조직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이 시점에서 시어머니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외아들이 세 번이나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한 번도 옥바라지를 하지 않았던 어머니였지만, 한편으로는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어른이었다. 아들의 행로를 찬성하든 않든 그 길이 옳은 길이라는 걸 아는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식을 지켰다.
생계를 책임진 며느리를 대신해 살림을 도맡고, 연년생 손주들을 키우며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단 한 번도 힘들다거나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들의 친구들이 집에 들이닥쳐 무언가를 논의하는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불안한 내색 없이 그들까지 먹이고 재우며,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혜숙 역시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큰 동요 없이 일상을 이어갔다. 1983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장준하 선생 8주기 추모식이 거행됐다. 그 자리에는 재야 원로들과 1960~1970년대 운동권 인사들, 김영삼 지지자들이 함께해 열기를 더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논의를 거친 끝에 1960~1970년대 OB 팀과 이범영, 연성수, 박계동, 박우섭 등 72학번 이후의 YB 팀이 청년운동단체를 출범시키기로 결정했다. 조직의 수장으로 추대된 김근태 선배를 설득하는 일은 마당발 혜숙의 남편 최민화가 총대를 맸다.
당시 인천산업선교회 실무간사로 노동운동에 발을 담근 김근태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최민화는 "형님 아니면 청년조직이 되질 않는다. 집을 팔아서라도 재정은 내가 책임질 것이며 감옥 가는 일도 내가 앞장서 형님을 보필할 테니 꼭 해주셔야 한다"며 삼고초려 끝에 승낙을 받아냈다.
그 이야기를 나중에 들은 혜숙은 쓴소리를 던졌다.
"아, 웃겨. 감옥은 그렇다 치고 이게 당신 집이냐? 부모님 집을 제 맘대로 팔아서 우짼다고?"
최민화는 실실 웃기만 했다. 운동은 남편이, 가정경제는 자신이 일찌감치 책임지기로 이미 각오한 혜숙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약국에만 전념하고 바깥 일은 남편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목숨 걸고 독재에 맞서는 이 마당에 남편이라고 안전하겠는가. 교도소 담장에 발 한짝 걸쳐놓고 다닌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민청년 창립대회가 열린다는 것은 알았지만 장소는 극비사항이라 혜숙도 몰랐다.
1983년 9월 30일, 철저한 보안 속에 서울 돈암동 상지회관에서 민청련 창립총회를 무사히 치렀다. 물론 창립 직후 주요 간부들이 안기부에 연행됐지만, 일주일 만에 전원 석방되면서 생각보다 순조롭게 단체가 출범했다. 민청련 깃발이 올라가고 김근태 부인 인재근의 이름으로 사무실도 얻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남편이 기사연 근무를 계속하며 민청련 2진 상임위 의장으로 활동한다니, 혜숙도 한시름 놓였다.

동네 입구, 목이 좋았던 약국은 손님이 많았다. 남편은 직장과 민청련 일로 밤낮없이 바빴지만, 그래도 사는 게 재미있었다. 혜숙은 약국에 묶여 있었지만, 약국 골방과 대흥동 집이 참새방앗간이라 소모임도 가끔 열리고, 돌아다니다 시간이 비는 후배들도 수시로 찾아와 답답하지 않았다.










▲  세민야국 앞에서. 안경 쓴 이가 박혜숙


ⓒ 민청련동지회




민청련 탄압의 광풍 속에서

1985년 봄은 특히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가 많았다. 한 번은 시위 주동자로 나선 민청련 사회부장 연성수가 중부경찰서로 끌려갔다. 끌려가는 차 속에서 전경과 치고받고 하다 의식을 잃어 백병원으로 이송됐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그런데 응급실에서 갑자기 심정지가 와 의료진이 긴급 검사를 준비하느라 난리 치는 사이 도망쳐 나왔다. 그가 택시를 타고 세민약국으로 들이닥쳤는데, 몰골이 가관이었다. 미친 사람처럼 윗통은 맨살이고 바지만 걸친 채 뛰어 들어온 것이다.
급한 김에 혜숙은 남편 옷을 입히고 골방 문을 닫았다. 한편 연성수가 잡혀간 줄 알았던 최민화는 밤늦게 들어와 약국 골방에 있는 연성수를 보고 까무러칠 듯 놀랐다.
"아니 너 어떻게 된거냐?"
연성수가 히죽 웃었다.
"원래 부정맥이 심하거든요. 응급실에 들어가 일부러 호흡을 조정해 숨을 잠깐 멈췄지. 하하하"
민청련엔 난다긴다 하는 인재들이 많은 줄 알았지만, 심장마저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인물이 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 최민화와 혜숙 부부는 박장대소를 했다.
아무튼 종로든 퇴계로든 수시로 동을 뜨고, 잡혀가고, 구류 살고. 늘 사건·사고의 연속이었다. 위태위태했지만 민청련은 점차 조직도 확장되고 위상도 높아졌다.
그해 여름부터 뭔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7월 8일, 올 것이 왔다. 상임위 위원장 김병곤과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 황인하가 체포됐고, 이범영에게는 수배령이 떨어졌다. 탄압의 먹구름이 시시각각 몰려오자 민청련 식구들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8월 5차 정기총회에서 구속을 예감한 김근태 의장이 직을 내려놓고, 고려대 출신 한경남이 후임 의장을 맡았다. 들려오는 소리도 흉흉했다. 용산경찰서로 면회를 간 박문숙(김병곤의 부인)이 남편이 몰래 전한 쪽지를 가져왔는데, 아무래도 타깃이 민청련과 김근태인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9월 2일엔 잠시 피했던 이대 후배 최정순의 남편 이을호가 아버지 제사를 모시려고 집에 들렀다가 안기부에 잡혀갔다. 8월 24일에 10일 구류를 받고 구금됐던 김근태 전 의장이 구금이 끝나는 9월 4일 또 어디론가 끌려갔다.
인재근과 이경은은 분명 치안본부일 것이라 생각하고 광화문 치안본부로 처들어갔다. 김근태가 있는 곳을 알려줄 때까지 한 발도 못 뗀다고 강경하게 버티는 인재근에게 국장이 할 수 없이 면담을 허용했다. 수사 기밀상 있는 곳을 알려줄 수는 없고, 옷은 받아주겠다는 국장에게 인재근이 "남영동이냐"고 찔렀더니 시인을 했다. 끌려간 날로부터 열흘쯤 지난 뒤였다.
한편 민청련 회원들과 가족들은 9월 5일부터 삼각동 민청련 사무실에서 구속된 김병곤과 불법 연행된 김근태, 이을호를 즉각 석방하라는 농성을 시작했다.
언제 끌려갈지, 연행은 받아 놓은 밥상이었다. 최민화는 물론 혜숙도 각오하고 있었다. 9월 6일엔 김희택, 서원기가 긴급 수배됐고, 10월 1일엔 청년부장 김종복과 대변인 김희상이 집에서 잡혀갔다. 드디어 10월 2일, 집으로 수사관이 들이닥쳐 어머니 보는 앞에서 남편 최민화가 끌려나갔다.
더 기막힌 것은 10월 5일 결혼식을 올린 새신랑 권형택이 설악산 신혼여행지에서 연행됐고, 8일엔 연성수 상임위 부위원장이 연행됐다. 민청련 집행부가 일망타진된 것이다.

혜숙도 약국을 일찍 닫고 농성장으로 합류했다. 인재근, 이기연(연성수의 아내), 최정순(이을호의 아내), 김설이(이범영의 아내), 박문숙, 조명자(김희택의 아내), 황인숙(권형택의 아내), 이경은(서원기의 아내), 이미영(김종복의 아내), 김해숙 등등… 민청련 여자들이 모두 모였다. 민청련 여자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민청련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가해오자 연행된 집행부 간부들의 부인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사무실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 민청련동지회




남편 대신 조직을 사수한 민청련 여자들

안기부와 치안본부가 번갈아 민청련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출입문을 폐쇄한 것을 인재근과 김설이 등 몇몇이 문익환 목사님과 이부영 선생을 앞세우고 가서 탈환한 뒤 농성을 시작했지만, 혜숙은 함께할 수가 없었다. 김근태 의장이 남영동에 구금된 건 확인됐으니까 남편과 민청련 식구들이 함께 있지 않겠는가. 그 사실만으로도 다른 때보다 훨씬 덜 불안했다.
구금 후 20일이 되면 일단 검찰에 기소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인재근은 20일째인 9월 26일 최정순과 함께 서울지검 공안부 5층을 지켰다. 그리고 고문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해 부축을 받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남편 김근태와 마주쳤다.
김근태는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가는 짧은 순간 동안, 자신이 당한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소금물 먹이기 등 갖가지 고문과 그 날짜까지 기억해 인재근에게 상세히 전했다.
그 길로 인재근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로 달려가 고문 사실을 알렸고, 그날 열리는 목요 기도회에서 김근태에게 가해진 고문을 폭로했다. 민청련 가족과 회원, 그리고 민통련 등 재야 인사, 종교계, 민추협을 망라한 조직들이 합심해 악랄한 고문 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인재근과 이기연이 고문 사실을 폭로하는 성명서와 호소문을 작성해 곳곳에 알리고, 정기적으로 목요 기도회에서 실상을 보고했다.
그리고 '고문 및 용공 조작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켜 고문 반대 투쟁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확산시켰다. 또한 인재근은 고문 실태를 녹음해 미국으로 보내 <뉴욕타임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게 했다.
김근태 의장의 고문 사실이 만방에 폭로된 덕분에 나중에 들어간 간부들은 고문 강도가 약했다고 한다. 혜숙은 남편이 구치소로 송치된 후에야 면회가 허용돼 만났지만, 적어도 눈에 띄는 고문 흔적은 없었다. 조금 당하기는 했지만 견딜 만했다는 얘기에 혜숙은 안도했다.
다시 옥바라지가 시작됐다. 미결수일 때는 매일, 형이 확정돼 대전교도소로 옮긴 후에는 매달 두 번의 면회가 허용됐다.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뒤 혜숙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첫 고속버스를 타고, 아침 9시경 첫 번째로 면회를 했다.
갑자기 닥친 병마
늘 과로와 긴장으로 지친 혜숙의 건강도 예전만 못했다. 집행유예로 석방된 동지들이 속속 나오면서 민청련도 활기를 띠었지만, 1년 6월을 언도받은 최민화의 옥바라지는 남아 있었다.
소화가 안 될 때마다 한 움큼씩 약을 털어 넣던 혜숙이 급기야 급성복통으로 병원으로 실려갔다. 내과 의원에 가서 위내시경을 했더니 위궤양이 상당히 심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일상인 생활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 얘기를 듣고도 약사인 혜숙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몇 년 전에도 몇 차례 심한 위염 증세로 내시경을 했었으니까.
잡혀간 남편 대신 민청련 조직을 지킨 아내들의 아지트는 세민약국 골방이었다. 일단 골방에 모이면 혜숙이가 박카스에 피로회복제 한 알씩을 돌린다. 거의 민청련 집행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의논할 일도 많았다.
농성 사이사이 누가 어느 지역, 어느 교회로 가서 고문 실태를 알릴 것인지, 성명서·호소문은 누가 쓰고, 기도회 때 규탄 성명서는 누가 읽을 것인지, 구치소 항의 방문은 누구누구가 갈 수 있나 일정과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그 모임은 동시에 수다 자리였다. 서방이 감옥에 갔든 말든 돌아가며 골 때리는 시댁 식구에, 내 서방 남의 서방 돌려가며 사정없이 씹고, 그러다가 약국 끝난 오밤중에 택시 두 대 불러 혜숙이 아는 사주집에 가 돌아가며 사주도 봤다.
1985년 12월 12일 발족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도 그 골방에서 전체 기획이 완성됐다. 단체 명칭과 창립 선언서, 로고는 이기연과 최정순이, 노동·학생·장기수 각 부문 구속자 가족들을 모으는 일은 인재근이, 이견과 갈등을 조율하는 책임은 박문숙과 인재근이 맡았다.
그러던 중 혜숙이가 또 쓰러졌다. 안색이 검게 변하면서 위통이 수시로 발작했다. 그때마다 혜숙은 진통제와 링거로 버티더니 골방에서 데굴데굴 구르다 쓰러진 것이다. 일단 다니던 내과에서 내시경을 받았는데 당장 대학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더란다. 여동생이 간호사로 있는 한양대병원으로 갔는데, 들려오는 소문이 흉흉했다.
"혜숙이가 위암이란다. 병원에선 수술이 어렵다고 한대."
인재근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맨날 위염에 위궤양이라고 하더니. 소식을 들은 이들은 망연자실했다. 환자 본인은 여전히 위궤양이 심해 수술을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는데. 몇몇이 병원을 찾아갔더니 혜숙이가 환자복을 입고 활짝 웃었다. 여전히 쨍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궤양이 심해 수술해야 할 것 같아. 민화 형한테는 절대로 얘기하지 마. 그 안에서 걱정만 할 텐데."
그 소리를 듣고 조명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열부 났다. 열부 났어. 이 지경에도 서방이 그렇게 걱정되든?"
말기 암인 줄도 모르고 명랑했던 박혜숙
혜숙의 수술 날짜가 잡혔다. 4월 14일 남편의 만기출소가 한 달도 안 남은 때였고,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 태어난 막내 중현이가 돌도 안 된 때였다. 8시간 가까운 긴 수술 끝에 암이 위 주변 장기까지 퍼져 비장과 췌장, 그리고 임파선 일부도 절제했다. 그러나 워낙 범위가 넓어 길어야 6개월 내지 1년일 정도로 예후가 나쁘단다.
4월 14일, 출소 나흘 후가 어머님 칠순이어서 잔치 준비에, 남편 맞을 생각에 병상의 혜숙은 한창 들떠 있었다. 그뿐인가. 출소하는 4월 14일이 초등학교 입학식도 못 간 둘째 중수 생일이라 아빠가 외국 갔다 온 줄 아는 아들에게 학용품이며 초콜릿까지 아빠가 줄 선물을 잔뜩 준비해 놓았다.
감옥 밖 세상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그런데 첫 소식이 아내가 죽을 병에 걸렸다니. 남편 속이 새까맣게 탄 줄도 모르고 혜숙은 병원 침대에서 화사한 웃음으로 남편 품에 안겼다. 오로지 마지막 면회도 못 가고, 마중 못 간 것만 잔뜩 미안해하며.

혜숙은 잠시 외출 허가를 받아 어머님 칠순잔치를 성대하게 치러드렸다. 옅은 화장에 화사한 한복차림이 환자 같지 않았다. 며느리가 중병에 걸렸다며 완강하게 잔치를 거부하시던 어머니도 억지로 눈물을 감추고, 아들·며느리 그리고 자식들의 친구들 축하 절을 받으셨다.










▲  박혜숙 시어머니 칠순잔치에 모인 민청련 여자들. 왼쪽 두번째부터 김설이, 박혜숙, 신금숙(김종복 부인), 조명자, 이미영(박우섭 부인). 이기연


ⓒ 민청련동지회




마침내 남편과 주치의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된 혜숙은 절망했다. 아니, 처음엔 뭔 헛소리를 하냐며 신경질을 냈다. 그러나 이어지는 항암과 방사선으로 머리칼은 뭉텅뭉텅 빠지고, 물만 먹어도 토해 휴지통을 끼고 살았다. 쓰디쓴 쓸개액까지 쉴 새 없이 쏟다 보니 식도와 콧잔등까지 헐고 고통으로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혜숙은 똑바로 눕지도 못했다. 위에 붙어있는 횡경막까지 잘라내 토악질을 막아줄 기능이 없어진 것이다.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면 몸을 일으켜 가라앉히고, 다시 눕곤 했다.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앉은 채 잠을 자면서 맘 편히 누워 자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48kg 체중이 34kg까지 떨어졌다. 완전히 죽음 직전의 말기암 환자. 남편이라면 꺼벅 죽던 혜숙도 독기를 뿜었다. 밥상에서 식구들이 김치며 나물이며 씹는 소리만 들려도 독이 올라 맛있게 먹으라며 숟가락을 탁 놓고 밖으로 나갔다.
풀무원을 경영하던 원혜영이 가져다 준 야채엑기스와 현미효소, 최정순이 다린 보약제, 기사연 식구들이 보내준 장어탕.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는 혜숙은 어머니 잡수시라고 강권했지만, 막상 어머니가 잡수시는 꼴을 보면 얄밉다는 듯 눈을 흘겼다. 말 한 마디마다 배배 꼬이고, 바라보는 시선마다 증오가 넘쳤다.
"내가 싫지? 귀찮아 죽겠지? 내가 얼른 죽어버렸으면 좋겠지. 그렇지?"
저는 죽을 것 같은데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먹고 일하고 활동하는 남편도 미워 미칠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내가 죽을 것 같아? 절대 안 죽을 거야. 살 만큼 살다 죽을 거라구." 악을 쓰며 어깃장을 놨다.
그러다가도 문득 저 죽으면 재혼할 거냐고 남편한테 물었다. 아내의 물음에 묵묵히 앉아 있는 남편을 보고 혜숙이 또 물었다. "당신 재혼할 거지. 그렇지?" 그러다가 "그래도 한 5년은 기다리겠지"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죽지 않을 거야'라고 뻔한 거짓말은 못 하겠고. 사정없이 들이대는 혜숙 앞에 최민화가 심통을 부렸다.
"나한테 무슨 복이 터졌다고 재혼복까지 있겠어. 그런 복이 있으면 어떻게 5년까지 기다려?""아무리 그래도 3년 상은 치러주겠지?"
그 말에도 대꾸를 안 하는 남편에게 혜숙이 힘없이 말했다.
"그러면 1년은 넘겨주겠지."
날이 갈수록 기력이 떨어진 혜숙은 돌을 막 지난 막내 중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중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퇴근한 남편에게 혜숙이가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올 12월까지는 살아야 할 텐데."
그러려면 6개월이 남아 있었다. 하필이면 왜 6개월이냐고 남편이 물었다.
"막내가 너무 어려 엄마를 전혀 모를 것 같아. 중현이가 커서 엄마를 기억하게 되려면 두 돌은 돼야겠지?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있어야 하는데."

막내가 두 둘이 되려면 앞으로 아홉 달이 남았다. 그 아홉 달도 자신이 없어 혜숙은 6개월 만이라도 한 것이다. 재혼복? 어디서 이런 아내를 만날 수 있을까. 십여 년 결혼생활 동안 말이 필요 없이 생각과 가치관이 완벽히 일치했던 사람. 각자 다른 곳에서 활동을 하더라도 모든 것을 공유하던 일심동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역사 인식, 신념까지 비슷했던 아내. 아내가 없는 세상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최민화는 눈물을 삼켰다.










▲  첫째 딸, 두 아들과 즐거웠던 한때의 박혜숙


ⓒ 민청련동지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이메일추출방지정책

회사명 : 앰버디자인LED 사업자 등록번호 : 502-13-40930 대표 : 오문환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로13길 45-1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제2019-대구동구-0629호
전화 : 053-941-8668 팩스 : 053-941-8967 전자우편 : am8668@hanmail.net
Copyright © 2015 앰버디자인LED. All Rights Reserved.

구입문의

010-6532-8525


상담시간 평일(월 ~ 금요일)
AM 09시~12시, PM 13시~18시 까지
상담시간 외에는게시판 이용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