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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무슨 나가고지난 2000년 8월, 아직 건강하시던 부모님과 자식, 손주들이 함께 찍은 사진.아버지는 노년기에 이르도록 건강하신 편이었다. 팔순이 넘어서도 자전거를 타셨고, 동네 마당 청소 같은 궂은일도 스스로 도맡아 하셨다. 주위에서는 다들 ‘법 없이도 사시는 분’이라며, 평생을 곧고 성실하게 사신 덕에 건강도 복 받으신 거라고 했다. 결혼 60주년 기념 일가족 행사를 열어드렸을 때만 해도 심신 모두에 별다른 이상은 없으셨더랬다.
그러나 80대 후반에 접어들며 상황이 급변했다. 갑자기 치매 증세가 발병한 것이다. 처음엔 발음이 어눌해지신다 싶더니 점점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 외출하셨다가 집을 찾아오지 못해 파출소에서 연락이 학자금대출이자전액감면 오는 일까지 벌어졌다. 집에 있는 멀쩡한 물건을 밖에 내다 버리거나, 반대로 쓸모없는 폐물 따위를 들고 오기도 하셨고, 가까운 집안사람을 못 알아보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폭력성까지도 나타났다. 이러한 증세가 차츰 악화되면서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셨고, 1년여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물론, 일기 쓰기도 입원 직 한국자산관리공사 이전 전에 중단되었고.
어느 일요일 아침, 별생각 없이 켠 TV에서 한 의사가 치매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마무리 단계쯤이었나, 그는 치매 예방법을 열거하면서 그중 하나로 일기 쓰기를 권장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언뜻 스쳐 듣는 순간, 퍼뜩 ‘아버지의 일기’가 떠올랐고, 가슴이 철렁, 머리가 쭈뼛해졌다.
아, 그랬던가. lh주택공사 아버지께서 그래서 일기를 쓰셨던 것인가. 조금씩 치매 기운이 오고 있음을 스스로 감지하고, 나름대로 일기 쓰기라는 처방으로 하루하루 치매와 싸움을 하고 계셨더란 말인가. 나는 그걸 여태까지도 단지 메모 습관이나 소일거리로만 여기고 있었다니. 그때 조금만 더 세심하게 관찰했더라면, 조기 진단과 치료로 증세의 진행을 얼마간 늦출 수도 있었을 텐데.
예금이율이런 못난 불효자식, 아버지께서 그토록 절실하게 병과 싸우고 계셨는데, 나는 그 전흔(戰痕)을 고작 ‘재미난 볼거리’쯤으로 여겼다니.
부랴부랴 책장 깊숙한 곳에서 아버지의 유품 보따리를 꺼내, 묻어두었던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새삼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보니, 모든 내용이 다시 보였다. 분명히 그랬다.
치매 증상이 월차 핑계 서서히 심화되던 무렵과 일기장의 글씨가 무너지고 난필이 두드러지던 시기가 정확히 맞물려 있었다.
치매를 앓으시기 몇 년 전,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북녘 고향을 그리워하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흐려져 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고 계셨던 거였다. 철자도 틀리고 모양도 삐뚤빼뚤, 내용도 무슨 뜻인지 영 알아보기 어려울 때까지도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볼펜을 잡고 온 힘을 다해 일기를 쓰신 것이었다.
그나마 펜을 들 기력이 얼마간 남아계셨을, 오래된 일기장의 마지막 쪽, 한 페이지에는 뭉개지고 벌어질 대로 벌어진 글씨가 여러 칸에 걸쳐 누워 있으면서 힘겹게, 애타게 누군가를 향해 손짓하며 절규하고 있었다.
“ㅊㅓㅅㅓㄴㄹ 아ㄷㄹ ㄱㅇ시ㄱ ㅌ시ㄱ ㄸㄹ…”
(처 선례, 아들 강식, 태식, 딸…)
나는 일기장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아들 이강식(프로젝트 좋은 세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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